안녕하세요. 오늘도 건강한 하루 보내셨나요? 저는 방금 홈트레이닝을 하고 왔는데 몸이 뻐근하기는 하지만 개운하네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배우 문예봉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배우 문예봉] 문예봉의 출생일은 1917년 1월 3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흥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국적은 일본 제국→미군정→대한민국 제1공화국→북한입니다.
[배우 문예봉] 문예봉의 본관은 알려져 있지 않고, 신체 스펙은 공개되어 있지 않으며, 가족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배우 문예봉] 문예봉의 학력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고, 종교 또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배우 문예봉] 야인시대의 심영 합성물이 유행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발음 문제로 무뇌봉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야인시대 합성물에서도 문예봉 대신 무뇌봉으로 동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배우 문예봉] 1936년, 이명우 감독의 '장화 홍련전'에서 아버지 문수일과 공연하여, 당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부녀공연기록을 남겼습니다. 후일 이규환 감독의 신작 '나그네'의 주연을 맡아 촬영을 마치고 대사의 후시녹음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영화 팬들에게도 문예봉이 널리 알려져 열차 안에서는 사인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고 도쿄에서는 당시의 톱스타 미즈타니 야에코(1905년 ~ 1979년)가 그녀를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배우 문예봉] 탈북에 성공한 신상옥, 최은희 부부를 배신자라 비난하는 인터뷰를 했고, 김일성이 죽었을 때 김일성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진이 찍혔는데 이 사진으로 남한에선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김씨돼지부자에게 충성을 바친 공로로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문예봉의 팔순잔치에는 김정일이 직접 생일상을 하사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배우 문예봉]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이 부부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 상황 속에서 비슷한 이력을 지닌 연극계 선배들을 따라 좌익 극단에 참가했습니다. 해방과 함께 당시 서울에는 '혁명극장', '해방극장', '인민예술극장', '청포도', '낙랑극회', '1.5 극장', '조선예술극장' 등 10여개의 좌익 극장이 생겨났는데, 문예봉 부부는 이런 극장에서 활동했습니다.
[배우 문예봉] 그러다 나운규의 눈에 띄어 이규환 감독의 첫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는 것으로 영화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일약 은막의 스타로 올라선 문예봉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유랑극단의 소녀에서 은막의 신데렐라'로 올라선 예인 것입니다.
[배우 문예봉]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임선규를 만나본 대남공작원이 전하는 바로는 당에서 임선규에게 사회적-사실적-혁명적인 글을 쓰지 못한다고 비판이 너무 강해서 북한의 메인스트림에서 점점 밀려나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절필했다고 합니다. 후일 그는 1970년 결핵환자 수용소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배우 문예봉] 문예봉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갈팡질팡인 것은 그녀가 월북 후 철저히 친북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미 북한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김일성에게 갖은 격찬을 다 받았으며, 실제로 수많은 월북 작가, 배우, 음악가들이 불우한 만년을 보낸데 비해 중간에 잠시 영화활동을 접은 시기 빼고는 전체적으로 잘 살았습니다.
이 포스팅이 배우 문예봉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으시는 데 도움이 되어드렸기를 바랍니다. 조만간 다른 인물을 소개하는 포스팅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남은 하루도 좋은 하루 되세요!